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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글/겨울이 끝이 났다

丹楓




https://www.youtube.com/watch?v=_dYADU6TLJI




너를 볼 수 없는 가을이 왔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계절을 보냈더라. 





 장마철이 끝나고 해가 아플듯이 따갑다가, 어느순간 날이 선선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시점이 오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켭켭히 쌓아올려진 푸른색을 선히 볼 수 있었다. 텁하고 습했던 바람이 가볍게 바뀌어 해가 지면 알싸한 추위를 일으켰다. 호숫가 주변의 갈대들이 초록빛에서 황금색으로 변한다. 부들가지들은 색이 조금 변한다. 밀들이 고개를 숙인다. 늘 푸를 것 같았던 나무들이 노란색으로, 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꽃들은 천천히 져서, 씨앗을 발아할 준비를 한다. 호수에서 한가로이 노는 사람들은 이제 없다. 모두가 농작지로 돌아가 수확의 준비를 서두른다. 그렇게 세상엔 가을이 찾아왔다.

 

 티어넌의 가을은 꽤나 한가롭다. 여름에 피는 꽃들은 여름이 끝나기 전에 새로 심을 준비를 끝냈고, 밀과 과일을 재배하는 이들만이 바삐 움직였다. 여름에 갈무리한 꽃들을 모두 말려 약재로 만들고, 이를 판매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 일은 가주의 일이었으니 티어넌의 사람들에게 있어 가을은 쉬어가는 시기이자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티어넌의 겨울은 매서울정도로 추웠기 때문에 그들은 식량을 비축하고, 겨울옷을 만들며, 사냥을 나가고 약들을 구비해놓는다. 그리고선 힘들었던 여름과, 다가올 겨울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하루를 보냈다. 티어넌의 가을은, 조용하며 고요했다.

 그리고, 티어넌 가 역시 조용했다. 이유를 꼽자면 애초에 그들의 가주는 말이 많은 자가 아니었으며, 사용인들도 그러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이유는 애너톨의 책사가 가을엔 제 일이 바빠 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는 티어넌과 달리 애너톨은 가을이 되면 매우 바빴다.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이에 대해서 자세히 묻지는 않았으나 얼추 무엇 때문에 바쁜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티어넌의 영지가 특이한 것이지, 사실 모든 영지가 가을에 가장 바쁜 것이 당연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저택을 제 집마냥 드나들던 자는 가을이 되면 발걸음이 멈추곤 했다. 그 탓일까, 간간히 사람 목소리가 들리던 방 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간히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이 창문에 부딪혀 내는 반복적인 소리와, 사각거리며 쉴 새 없이 펜이 움직이는 소리와, 그러다 어느 순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아이베르크의 낮은 숨소리만이 섞여있을 뿐이었으니. 

  그는 자신이 왜 창밖을 바라보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창 밖에는 이젠 붉게 물들어버린 정원이 존재했다. 날씨는 선선하니 산책을 나가기 좋았다. 하지만 아이베르크는 산책을 나가기보단 방에서 열린 창문을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기다리는 사람은 이번의 계절엔 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염없이 창 밖을 보았다. 애초에, 사람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이상한 것인데 왜 자꾸 창문으로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록시 애너톨 탓이다. 그래, 사람이라면 저렇게.... 


 달칵, 기대와 다르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늙은 집사장이었지만. 어린 가주의 얼굴에서 잠깐의 찌푸림이 있었지만 늙은 노인은 왜 자신에게 화살이 돌려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모른 척 헛기침을 한다. 담담히 오늘 애너톨의 영지에서 늘 열리던 가을 축제가 열린다고 알려준다. 집사는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보곤 한숨을 내쉰다.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아마 오늘 밤에 티어넌엔 손님도, 주인도 없겠구나 싶었다. 넌지시 호위를 준비할까요, 라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괜찮다-였다. 형식적인 대화였다. 늙은 노인은 그저 한숨, 한숨을 쉬었다. 

 사실 아이베르크 티어넌는 애너톨의 가을 축제를 처음 가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의 가을, 애너톨과의 첫 만남 이후 늘 해오던대로 갔었던 것이고, 두번 째의 가을엔 서로가 최악의 계절을 보냈기에 갈 수 없었다. 잠들어있던 누군가와 그 옆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잠들어있던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얼음 위를 걷고 있었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던 자들 역시 그 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세번 째 가을이 왔다. 제 주인은 티는 내지 않지만 조금 신이 난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창문을 열어둘 리가 없다. 늙은 노인은 어린 주인의 변화가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 사람이 스스로 변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한 변화는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음을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우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보지 않았는가. 한겨울에 갑자기 사냥을 나간다고 말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 앞이 아찔해지곤 했다. 언젠간 벽 너머로 나아갈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아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일은 달갑지 않기 마련이었다.


 지금 나갈거야. 오늘 안 들어올 수도 있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창문만 열어둬. 주인님, 당신은 티어넌의 주인이면서 굳이 창문으로 들어올려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짦은 잔소리가 이어진다. 아이베르크는 그 말에 고개를 휙 돌리며 굳이 자고 있을 사용인들을 깨우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말했다. 아, 아직도 어린사람. 철부지. 아이베르크는 붉은색 망토를 두르곤 안에 검을 찬다. 제 주인은 언제나 푸른 망토만 찾았었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옷장 한 켠에 있었던 붉은 망토를 곧잘 입기 시작했었다. 지금보니 평소에 입던 화려한 셔츠와 조끼는 어디가고, 살짝 거친 옷감으로 만들어진 셔츠와 편한 바지 차림이다. 눈치를 주니 장난스럽게 웃어보인다. 그 웃음이, 꽤나 순수했다.

 그래도 모든 변화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련 이런 것들이라던가. 집사는 주인을 배웅하며 말을 건냈다. 전에 비해 피곤하진 않으신가봅니다. 눈 아래가 맑아지셨잖아요. 아이베르크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더니 거울을 보았다. 그제야 제 눈 아래 검게 내려왔던 피로의 흔적들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언제부터였더라. 그렇네, 나 그럼 가볼게. 손엔 검과 함께 무언가 포장되어 있는 것이 들려있었다. 집사는 대답대신 방을 나선다. 곧 방에는 커튼이 바람에 의해 흔들려 창문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남게 되었다. 


 가을,  고요하고, 누군가를 보러가고, 이렇게 보러갈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게 되는 계절. 아마 이번 계절에도 너는 주민들이 손에 하나씩 쥐어주는 먹거리들을 어찌 할 수 없어 양 손 가득 들고 다닐 것이다. 거절 하지 못하는 사람을 찾는 건 쉬우니, 아마 뒤를 따라다니며 네가 쩔쩔매는 모습이나 실컷 보다 가야지. 저번 가을에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만약 이번에도 그렇게한다면, 그 틈에 끼어 간만에 바이올린이라도 연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곳의 축제에서 만큼은 자신은 티어넌이 아닌 아이베르크라고만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참 말을 타고 달려 적당한 곳에 말을 매어 숨겨두곤, 낯설지만 익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마을 입구서부터 흥겨운 노랫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생각해보니 포장해온 것을 들고 올 것이 아니라, 우편으로 보냈어야했다. 또 손이 없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을 중앙에 다다랐을 때 화려한 장식과 은은하게 빛나는 전등을 본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세상이 조금 느리게 움직인다고 느꼈다. 그리고 가판대가 몰려 있는 곳에서 잔뜩 음식을 받아들고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검은 머리의 누군가를 보았을 때 그제야 아이베르크는 이 계절이 가을임을 깨달았다. 


가을, 가을이구나. 


 발걸음을 내딛어 제가 찾았던 사람에게 다가갔다. 곧이어 들려오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의미없는 말들과 날이 선 듯 서지 않은 대화. 묘한 공백이 이어지지만 어색하진 않은 거리감으로, 익숙해진 침묵으로 함께 걸음을 맞춰갈 뿐이었지만. 


 다른 이들 보다 늦게, 아이베르크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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