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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글/겨울이 끝이 났다

Monologue



https://youtu.be/_CEKziuaFFo


1. 혼자서 중얼거림.

2. 배우가 상대역 없이 혼자 말하는 행위. 또는 그런 대사. 


 록시 애너톨이란 사람에 대해 간결히 고하자면, 그는 이상하며 미쳐있는 자였고 말이 많이 없는 편이었으나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주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자였다. 늘 몸이 피곤한 편이었고 다른 이들보다 건강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귀족들 앞에 서야 할 때는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곤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실상 록시 애너톨이라는 자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자는 별로 없었다.

 그의 손은 한겨울의 냉기를 끌어다 모은 것처럼 차가웠으며, 잘 웃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비웃는 것엔 소질이 있어 그가 웃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비웃고 있다는 뜻이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지고 안경을 썼다. 그는 재회를 가장하며 만들어진 연극의 첫 막에 검을 들고 와 상대를 찌르는 자였고, 그 후에도 뻔뻔스레 찾아와 말을 붙이며 시비를 거는 자였으며, 누군가가 사라지면 수소문을 해서 찾기도 했다. 상대가 머물러 달라는 부탁을 받곤 머물러주는 자였고, 가끔은 축제를 즐기는 사람이기도 했으며 펄펄 끓는 이마를 쓸어 넘겨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솔직하지 못했고, 무언가가 사정이 있으며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알아주길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왜? 라는 이유를 물어도 다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사람에겐 친절한 면이 있었다. 아마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 것은 아이베르크 티어넌이란 사람에게 한정된 반응일 것이다. 록시 애너톨은 아이베르크 티어넌을 싫어한다. 그러니 질문에 대답해줄 이유는 없다.

 그의 옆에는 이상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아마 그도 그자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묵묵히 옆에 있는 사람을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짐작한다. 그가 지금의 나의 독백을 듣는다면 분명 멍청하다고 말해줬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록시 애너톨이란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문장배열이 매끄럽지 않고, 진행의 흐름이 복잡하고 두서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을 양해를 구한다. 나 역시 이것을 말하면서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비우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히겠다.

 우리의 재회를 연극의 1막으로 친다면, 그 후로 우리가 만난 1년을 2막으로 치겠다. 계절이 바뀌고, 호수가 얼었다가 녹고, 꽃들이 피고 질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네가 날 싫어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겨울 때쯤에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2막의 마지막은 화사한 봄이었다. 생명이 태동하고 얼었던 대지가 녹아 새로운 새싹을 피워내는 시기. 힘들었던 겨울이 지났기에 모든 일이 괜찮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던 계절.   그 모든 일엔 너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무연 중에 긍정적인 결말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그것이 인생이겠는가. 희망은 필연적으로 불행을 만들고 그것은 인간을 집어삼키기 마련이었다.


 여름이 왔다. 티어넌의 여름은 가장 활기차다. 어딜 보아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농부들의 노랫소리, 사용인들은 호수에 나가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고 나는 언제나 그렇듯 그 오두막에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듯이 내 여름엔 네가 있었다.

 그날은, 여름이 끝나감을 알리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가득했었고 너는 이상할 정도로 피곤해 보였으며 여름이란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창백했었다. 의문과 걱정이 생겨 그만 돌아가서 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으나 너는 괜찮다는 말로 일축했다.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 내게 시비를 걸었고 나는 듣고 넘기는 것으로 상황이 전개될 줄 알았다. 그렇지만 네 말의 시작은 있었으나 더 이어지지 못했고, 너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상함을 느껴 서류에서 눈을 떼 네게로 향했을 때-


사실,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너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사용인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너를 눕히고 의사를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일렬로 벌어진 일들을 납득하는 데 있어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여름이 끝나감을 느꼈다.



...전개가 끝나고, 연극의 새 막이 올랐다.

3막이다. 늦여름에 록시 애너톨은 오랜 잠자리에 들었다. 너 혼자만 겨울을 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진찰을 끝낸 의사는 네 몸이 아주 좋지 못했고, 심리적이나 정신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던 것이 결국엔 몸에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냥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잠. 언제쯤 일어날지는 본인도 모른다고 했다.

 애너톨의 가주-너의 허물 좋은 대리인이지만-와 연락을 해 너를 이쪽에 머물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환자를 돌보기는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것이 지금 네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되겠다. 볕이 가장 잘 드는 손님방에 너를 눕혔다. 햇빛이 내려 드는 창 아래로 잠들어있는 네 모습은 꽤 이질적이더라.


 록시 애너톨이 잠들어 버린 후,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아무래도, 조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애초에 내가 지금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명일 것이다. 분명 처음엔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따금 너를 보러 갔다. 첫날엔 곧 일어나겠지, 라고 말하며 너를 보곤 나갔다. 나는 네가 금방 깨어날 것이라고 믿었었다.


 날의 일수가 더해질수록 아이베르크 티어넌이 찾아가는 횟수도 늘었다.


세 번째로 찾아갔을 때는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었다.

다섯 번째로 찾아갔을 때는 옆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었다.

열 번째로 찾아갔을 땐 네 이름을 불렀었다.

스무 번째엔 말을 걸었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른 번째 때는 네 이마를 쓸어넘겨 보기도 했다.


육십 번째 쯤에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몇 번째로 찾아갔는지 횟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말과 행동이 줄 거나, 어느 날에는 많아졌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마음 한 켠을 비집고 기어들어 오더라.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록시 애너톨이 티어넌 가에 온 이후 모든 귀족들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사교모임을 나가는 횟수도 줄었다. 소문이 빠른 귀족들이 애너톨과 티어넌 사이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떠들어댔다. 마침 애너톨 가의 책사가 사교 모임에도 나오지 않기 시작하니 물어뜯기 좋은 먹이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소문을 바로잡을 시도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미쳐가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저 표현이 현재진행형인 이유는 우리의 상황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여전히 잠들어있고, 계절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나는 계속해 네 방을 찾아가 잠든 모습을 보고 나온다. 내가 방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네가 숨을 쉬는 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자, 세 번 째 봄이 찾아왔다. 이제 곧 여름이 올 것이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겨울을 살고 있다.

네가 잠든 이후로 나는 최악의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을 보냈다. 특히 이번 겨울은 더욱 그랬다. 너도 아팠지만 나도 아팠던 그런 계절을 보냈다. 나에게 있어 봄은 숨을 쉬어가는 계절이었는데, 이번 봄은 숨통을 더 조이고 갔다. 이제 너만 겨울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역시 연장되어 버린 겨울을 살았다.

 너와 나의 끝에 서로가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나는 그 끝엔 서로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네가 칼을 겨눈다면 나는 어울렸을 테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 혼자 나에게 끝을 던져주고 간 기분이었다.


네 마지막에 내가 있으나, 너는 내가 있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네 앞에서 이러한 독백을 말하고 있다. 연거푸 말한다.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제발 좀 일어나라고. 대답해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더 이유를 묻지 않을 테니 일어나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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