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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 가장 춥고 고달픈 계절이 왔다.
티어넌의 겨울은 호수가 얼어붙는 것으로 시작을 알린다. 광활히 펼쳐진 호수가 물가의 끝에서 부터 얼어붙고, 그 위로 사람이 올라가도 무너져내리지 않을 때 쯤이 되면 영지의 사람들은 차갑게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에 구멍을 내어 겨울 낚시를 즐겼다. 어린 아이들과 젊은 남녀들은 스케이트를 탄다. 호수 위로 눈이 내린 모습은 고요하고 새하얗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 곳에서 만큼은 사라지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들리는 것이라곤 눈이 쌓이는 소리, 물가의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는 소리들 뿐. 그 모습이 장관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 얼어붙은 호수를 보기 위해서 관광객들도 오는 시기였다. 호수는 여름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에게 있어선 또 다른 즐거움과 삶의 터전을 제공해주었다.
그렇지만 티어넌 저택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겨울만 되면 몸이 좋아지지 않는 어린 가주 탓이었다. 이상하게도 아이베르크는 겨울이 오면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의사도 이유를 알지 못하여 체질의 탓이라고만 말을 하였다. 타고난 체질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니 본인이 조심할 수 밖에 없다는 진단도 내려주었다. 겨울은 아이베르크가 가장 위축되는 시기였고, 실제로도 많이 아팠기에 겨울은 티어넌 저택과 티어넌을 따르는 사용인들에게 있어선 가장 위험하고 조심해야할 계절이었다. 한 번 감기에 걸리면 한 달 이상을 가는 경우가 많았고, 쉽게 지치고 피로하였으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탓일까. 겨울의 티어넌 저택은 항시 따듯하며 참나무 향이 가득했다. 몸을 따듯하게 유지하는 차를 항시 옆에 두게했고 찬 음식을 멀리했다. 그리고, 아이베르크는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지 않고 자신의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아이베르크는 겨울이 싫었다. 자신이 약해지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약해진 자신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였다. 또한 자신이 약해졌음을 마주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싫었다. 마지막으로, 겨울이라고 해서 귀족들의 사교모임과 보여주기식 친목다지기 행사가 없어지긴 커녕 늘어난다는 점이 불쾌감을 주었다. 여러 이유들이 합쳐저 겨울이 싫다는 결론을 내는 것이다.
주민들에겐 있어서 사랑 받아야 마땅한 호수이고, 실제로도 사랑을 받고 있는 호수였지만, 겨울만 되면 얼어붙은 호수를 보겠다며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오는 몇 몇의 귀족들이 있었다. 티어넌 가의 영지에 있는 호수가 그리 아름답다면서요? 대외적인 이유는 그러했고, 속내는 아이베르크 티어넌이 얼마나 아픈지 보러 오는 것이다. 아이베르크는 이들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지만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도 그러했다. 하필 몇 일을 제대로 잠들지 못한 날, 그 날을 골라 몇 명의 귀족들이 저택을 방문했다. 피로했다. 그들을 맞이한 아이베르크의 얼굴엔 피곤함과 아픔이 가득했다. 이것을 방문한 자들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이라면 집주인의 상태를 보고 돌아가는 것을 택했을 것이지만, 이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라며 천연덕스럽게 응접실의 의자를 빼어 앉는다. 사용인들은 가주의 눈치를 살핀다.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웃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응대한다. 그렇지만 그 속내 만큼은 그러지 않았고, 사용인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노란 카틀레야로 테이블의 장식을 바꾼다. 아이베르크는 그것을 보고 삐두름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 앉은 이들은 꽃이 예쁘다며 칭찬하기 바빴다.
티어넌, 요즘 거래는 어떠한가요? 약재가 아주 거래가 잘 된다는데. 칭찬을 하는 듯 하면서 상대의 수입을 알려고 드는 말이 거슬렸다. 거래야 늘 잘 되고 있지요. 덕분입니다. 똑같이 허울 좋고 진실이라곤 없는 말로 돌려주었다. 호수가 참 아름다워요. 네, 그렇죠? 이 또한 신께서 주신 선물이죠. 영양가 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허울뿐인 관계를 유지하기란 이리 가벼운 말로도 충분한 것이다. 아이베르크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감기가 올 모양인건지 목 안 쪽이 갈라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얼른 이들을 돌려보내고 쉬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었다. 그러고보니 애너톨 가의 가주는 참 이용해먹기 쉬운 사람인데 말이죠. 그렇지 않아요? 아이베르크는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말을 시작한 귀족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 옆에 책사만 아니었다면 말이죠?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그 책사. 한 쪽 얼굴을 가린게 여간 불길하게 생기지 않았나요? 그 책사만 아니었으면 애너톨 가는 이미 망해버리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나요? 티어넌?
저 질문을 굳이 아이베르크에게 하는 이유는, 선대에서 부터 티어넌 가와 애너톨 가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현재도 각 가문의 새로운 가주들은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베르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그 애너톨이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사실은 선대 애너톨이 죽은 이유도 조금 이상하다는 등 말이다. 먹이 하나를 던져주면 신이 나서 뜯어 먹는 것이 이들이다. 그 광경은 동물들의 식사시간과 비슷하여, 본질을 살피려 하지 않아도 천박함이 드러났다. 그것을 좋은 옷과 장신구로 가려보았자, 본성은 가려지지 않는다. 구역질이 났다. 그렇지만 이들이 물어 뜯고 있는 것이 록시 애너톨이라는 것이 거슬렸다.
아이베르크가 갑자기 일어남으로써 대화가 중단되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시선이 자신에게 모임을 확인한 아이베르크가 입을 열었다. 저희 영지는 호수 말고 겨울철에 할 만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슴사냥을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겨울에 인적이 드문 호수와 작은 숲에 사슴 무리가 산답니다.
사냥, 좋아하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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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사는 사슴들은 그 무리가 적지도, 많지도 않았다. 보통 이 사슴들은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는 호수 근처에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겨울에는, 얼음이 얇게 언 폭포에서만 물을 구할 수 있던 탓에 사슴들은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건넜다.
그들은 티어넌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모두가 사슴 사냥에 나섰다. 오히려 따분하고 언제 먹이의 대상으로 바뀔 지 모르는 대화보다는 사냥이 더 재미가 있었고 구미가 당겼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베르크를 선두로 모두가 새하얀 털 옷을 껴입은 채 사용인들을 대동하고 얼어붙은 호수 위에 자리를 잡는다. 말이 사슴 사냥이지, 사실은 유희의 연장선이다. 피곤해보였던 아이베르크는 생기가 돌아보였다. 그들에게 손수 총알을 장전한 라이프를 건내주기까지 한다. 저 쪽에 사슴들이 있습니다. 가실까요? 귀족들은 좋다며 따라나선다.
사냥'놀이'를 할 땐 보통 사냥에 성공하거나 많은 동물들을 잡은 사람이 이긴다. 날이 춥고 겨울엔 동물들의 움직임이 줄어드는 시기다. 그러니 많은 동물을 잡기는 힘들 것이다. 이번의 놀이는 사슴을 잡는 이가 이긴다. 누군가가 고개를 한 번 까딱 움직이는 것으로 그 뜻을 전했다. 새 규칙을 발의한다.
새로 발의된 규칙을 무언의 동조로 승인한다. 암묵적으로 규칙이 자리잡았다. 놀이가 시작되었다.
사냥을 할 때에는 둘 혹은 세 명씩 조를 지어 다닌다. 겨울철의 사냥은 그것이 필수였다. 위험하기도 하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였다. 사슴들은 물을 먹으러 갈 땐 무리를 지어 가는 경우가 많다. 발자국은 많지 않다. 앞서간 사슴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밟아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아이베르크는 아까의 말 많던 귀족과 함께 조를 이루었다. 이 자는 사냥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인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맞아요, 티어넌. 그거 아십니까? 아까 말한 선대 애너톨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인데요. 아뇨, 모릅니다. 얘기해보시죠. 아이베르크는 사슴의 발자국을 찾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말 많은 자는 이야기는 이러했다. 선대 애너톨은 마차 사고로 죽었는데, 이것이 사고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선 그러한 소문이 돈지 꽤 되었지만 애너톨 가의 가주 앞에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마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지저분한 소문이군요. 아이베르크는 흥미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상대는 아이베르크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 지금 가주에 대해서도 조금 말이 많단 말이죠. 지금의 가주가 금발 적안이지 않습니까? 사실 원래 머리색이 흑발이란 소문이 있어요. 무언가 이상하단 말이죠. 현 애너톨의 가주와 선대 애너톨의 가주와 분위기가 다르다 해야할까. 마치 다른 사람같다는-
탕.
총성이 울렸다. 후두둑, 하고 나무에 쌓여있던 눈들이 쏟아져내리는 소리가 난다. 신이 나서 말하던 이의 표정은 공포에 짓눌려 새하얗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베르크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머리 바로 옆에.
저는 헛소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냥 중에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은 더 안 좋아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망상은 망상으로 끝내. 오늘 내 앞에서 말한 걸 다른 귀족들에게 말하지 않는게 좋아. 당신도 알다싶이 나는 티어넌이야. 애너톨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돌면, 사이가 좋지 못하단 이유로 우리도 타격을 입거든? ....알아들었나요?
라이플은 그의 머리에서 고작 30cm정도만 떨어져있었다. 만약 아이베르크가 반동을 이기지 못해 방향이 틀어졌다면 발사된 총알은 허공이 아닌 자신의 머리를 관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이베르크는 자세를 풀고 라이플의 장전을 푼 다음 어깨에 걸었다. 그리곤 웃으며 남자의 뒷 쪽을 가르키며 말한다. 사슴을 잡았네요. 그렇지 않나요? 남자는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본능이 끊임없이 머리 속을 아프듯이 때리며 울리고 있었다. 뒤돌아보지마. 뒤돌아보지마. 그 다음 사냥 당하는 것은 네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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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베르크의 라이플에서 발사된 총알이 물을 마시고 있던 사슴의 심장을 관통했고, 사슴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조를 이루어 한 놀이었기에 사슴 사냥은 아이베르크와 말이 많은 귀족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다만 집결지점으로 돌아온 말 많은 귀족의 상태가 어째서인지 좋지 못했고, 심지언 사람들이 얼추 모이는 것을 확인하자 자신은 몸이 좋지 못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보겠다는 말을 하면서 모임의 분위기가 흐트러져버렸다.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 환히 웃으며 말하는 아이베르크의 말에 기겁을 하며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말 많았던 자를 보고 다른 이들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죽은 사슴의 뿔을 잡아 크기를 가늠하는 아이베르크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오늘은 즐거웠으니 이만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긴다. 아이베르크는 굳이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말 없이 사슴의 목을 손질용 나이프로 찔렀을 뿐이었다.
그 날의 티어넌 가의 저녁은 사슴고기로 만든 스튜였다. 그렇지만 어린 가주는 그것을 반도 먹지 못했다. 저택에 오자마자 열이 심하게 올랐고, 결국엔 눈에 젖은 종이마냥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사용인들이 아이베르크를 방으로 옮기고 약을 먹이고, 밤을 새어 간호했다. 새벽이 되서야 열이 떨어져 눈을 뜰 수 있었다. 급히 새벽 진찰을 온 의사가 말했다. 감기시네요. 독감이시구요. 제가 겨울엔 조심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아이베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
의사가 떠난 후, 집사가 아이베르크에게 물었다. 사슴 고기는 그렇다 쳐도, 뿔과 가죽은 어찌할까요? 나중에 쓰실건가요? 아니면 상인에게 보내 이익을 보실까요.
아이베르크는 열이 심하게 오른 탓에 제 옆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구분을 못하는 듯 했지만 실날같은 정신을 붙들고 열에 의해 쩍쩍 갈라져버린 목구멍을 열어 대답했다. 그 뿔, 머리에 이어지도록 보존 처리를 한 다음 사슴뿔 장식으로 만들어서 애너톨 가로 보내줘. 수신인은 록시로 하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을 듣고 늙은 사용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바로 대답을 했다는 것은 사슴을 잡은 순간 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겠지. 어쩌면, 사슴 사냥을 나서겠다고 말할 때 부터 생각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늙은 사용인은 몇 마디의 조언을 덧붙이려 하였으나 아이베르크의 상태를 보고 이번은 넘어가기로 한다. 편히 쉬시실 바랍니다. 당분간 방문객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이베르크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정신이 수마에 먹혀들었다.
꿈 속에서 얼어붙은 검은 강 아래 잠들어있던 아이베르크가 얼음을 깨고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은 따듯한 공기에 섞여 존재감을 들어낸 찬 공기 탓이었다. 희미하게 눈을 떠 창 쪽을 확인하니 창문이 열려있었다. 닫아야하는데. 그러나 몸을 일으키기엔 계속해 자신을 평온한 얼음 아래로 끌어당기는 속삭임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누군가 닫아주지 않을까. 눈을 감는다.
난 겨울이 싫어, 록시. 난 겨울이 싫다고.
창 쪽에서 알 수 없는 인기척을 느껴 잠결에 그리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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