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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글/겨울이 끝이 났다

revoir




https://youtu.be/AD-8urlz7Gg



손님인지, 불청객인지, 아니면 '모자란 것' 인지 




 아이베르크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상대를 바라본다. 상대의 의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는가? 기억을 헤집어 제 앞에 있는 자와 닮았던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그렇지만 닮았을 뿐, 이 자와 같은 얼굴은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 눈에 익은 얼굴이다. 어디서 마주쳤는가, 어디서? 누군데 이리 겁도 없이 귀족의 저택에 쳐들어와 '죽여도 돼?' 라고 묻는단 말인가. 묘한 표정으로 한참 상대를 본다. 검 한 자루가 옆에 매달려있고, 손에 상처가 많은 것을 보니 어느정도 실력이 있는 상대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온 것일까? 란 질문을 던진다. 누가 죽이고 싶은 상대에게 허락을 구한단 말인가. 그리고 누가 그 대답을 긍정적으로 내어주겠는가. 

 제 앞의 이 사람은 분명 어딘가 이상한 것이 틀림없다. 모자라거나, 미쳤거나.

 편안한 얼굴로 자신도 벽 뒤에 장식되어 있는-그렇지만, 사실은 날이 세워져 있다.- 검을 집어들었다. 

 

"그래. 할 수 있으면"

 ..그리고 저리 말한 나도 미친 것이 틀림없다. 


 기묘하고도 끔찍한 '첫 만남'은 불청객이 아이베르크에게 칼을 겨눈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아이베르크역시 칼에 가만히 찔리고 있을 자는 아니었기에 방어를 했지만, 본디 정상인이 미친 자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가슴 아래 쪽 작은 부상을 입게 되었고, 소란을 듣고 방으로 온 사용인들에 의해 상황은 종료되었다. 애지중지하는 어린 가주가 다쳤다. 티어넌 가의 사용인들은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거나, 말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어린 가주를 매우 아끼고 평생 따라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에게 저 불청객이 얼마나 괴인(怪人)이며 악인(惡人) 이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어린 가주가 저 불청객을 냅두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베르크는 급히 손을 들어 사용인들이 불청객을 공격하려는 것을 제지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예기치 않은 손님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그 곳을 떠났다. 아이베르크는 다친 상처 때문에 아픈 것인지, 아니면 가슴 한 켠, 묵직하게 올라오는 감정 때문에 아픈 것인지 구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용인들은 난리가 났다. 당당하게 가주의 방으로 살해협박을 하러 간 자를 아무도 보지 못했고 이를 막지 못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베르크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드물게 가주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한 동안 티어넌 가의 저택이 소란스러웠고, 좋지 못한 일은 와전되고 부풀려져서 영지 내 사람들에게, 그리고 다른 귀족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지 내 주민들은 자신들의 가주가 다쳤다는 것을 걱정했고, 다른 귀족들은 아이베르크 티어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내심 아쉬워했다.


 그 후, 일 주일 정도 지난 후 티어넌 가엔 여러 통의 편지가 왔다. 아이베르크의 쾌차를 바라는 형식적인 안부 편지, 다음 약재의 거래의 양을 정하자는 업무 편지, 소나무 모양의 밀랍 인장이 찍혀있으며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은, 딱 봐도 의심스러운 편지. 편지를 태워버리자는 집사의 의견은 듣지 않은 채 아이베르크는 자신에게 온 편지니 읽어보겠다며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일 순간 아이베르크의 입이 삐뚜름하게 올라가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 그 옆의 집사는 자신의 가주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 편지를 읽는 아이베르크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편지를 읽고 난 후, 허탈히 웃는 그를 보며 심란했다고만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록시, 록시 애너톨. 그래, 너 였구나. 그리 중얼거리며 몇 번이고 편지를 다시 읽고, 읽으며 머리를 쓸어넘긴다. 그 후, 모든 사용인들을 물리고 어린 가주는 방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베르크 티어넌이 록시 애너톨이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와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알았다. 록시 애너톨. 이 한 마디로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애너톨. 티어넌 가문과 지독하게 그 시작이 어디서부터일지도 모를 정도로 엮인 악연이며 서로의 불행을 바랬고, 각자의 불행을 먹으며 성장한 사이. 한 쪽이 불행해지면 한 쪽은 행복해했고 한 쪽이 쇠태하면 한 쪽은 발전했다. 그러한 관계의 가문이 아니던가.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을 한 자를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만난 것이다.  끊어진 줄 알았던 질긴 인연이 다시금 아이베크르의 인생에 얽혀들어온 것이다. 


 이 후 서술될 것은, 홀로 방에 남은 누군가의 서투른 투정이자 안쓰러움이고,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록시 애너톨을 기억해냈다.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렇지만 자신의 마지막 기억과는 확연히 달라진 록시 애너톨의 모습으로 인해 그 날의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록시 애너톨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너무 오랜시간을 만나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으니 성장했을 것이라 생각은 했었지만, 저런 모습으로 성장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보자마자 상대를 죽이고 싶다고 허락을 구하는 이를 누가 옛 친구라고 여기겠는가. 어이없다는 감정이 첫 번째로 떠올랐고, 그 다음은 분노였다.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가.


  다친 상처부위을 매만져본다. 자신이 막지 못했다면, 록시의 검은 그대로 몸을 관통했을 것이고 망설임없이 검을 빼내었을 것이다. 검의 끝에서 검붉은 혈은이 뚝, 뚝 떨어졌을 것이고 아이베르크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고 한 상대에 대한 자연스러운 분노가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감히? 나를? 웃기지도 않는 군. 오랜만에 만났더니 불행하게도 그 사이에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그 다음으로 떠오른 감정은, 슬픔이었다.


 아마 이 감정이 록시가 자리를 떠날 때, 가슴 한 켠에서 묵직하게 올라왔던 그 '감정'일 것이다.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자신의 옛 친구가 저리 변한 것에 대해서, 저리 미쳐버린 것에 대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에 대해서 슬픔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는 분노에 잡아먹혀 이내 곧 희미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감정이 아니었다. 의문이었다.


왜?


왜, 록시 애너톨은 아이베르크 티어넌을 무슨 이유로 인해 죽이고 싶어하는가.


왜?


그렇지만 그 대답을,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기엔 자신이 알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록시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고, 서로 보지 못했던 세월의 간극은 상대에 대한 정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자신은 평생 이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평생을. 아님, 자신이 록시 애너톨에게 정말로 죽는다면 죽기 직전엔 그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미친 놈을 만났더니 미친 생각을 하는 구나. 


...이 때까지의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록시 애너톨에게 죽어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이러한 악연과의 재회가 마무리되고, 다시 마주 칠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었던 아이베르크 티어넌과 록시 애너톨은 다음 달에 열린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서 만났다. 그 때 모임의 화두는 아이베르크가 완전히 회복했다는 것에 대한 축하와, 애너톨 가문의 가주가 바뀌었고, 그 새로운 가주가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교 모임에 참석한 이들의 시선은 티어넌 가문의 가주와 애너톨 가문의 가주에게로 쏠렸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비공식적인 세 번째 만남은, 서로가 서로의 본심을 숨긴 채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인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 이번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서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말라. 이 글은 누군가의 기록이며 후회이고, 어느 날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게 되는 날 다시 꺼내어 뒷 이야기를 적어내릴 곳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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