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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글/겨울이 끝이 났다

熱帶夜




지독한 여름이 왔다.



https://youtu.be/mRcQ7HKpzMg




  티어넌 가의 영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 샤스타데이지 군락이 있다. 샤스타데이지는 5월과 6월의 여름날 피는 꽃으로, 흰색의 꽃이 특징인 여름철의 꽃이다. 식용으로 쓰이기도 하는 이 꽃은 군락을 보러오는 관광객들을 불러모았다. 그 탓일까, 티어넌 가문의 영지의 사람들은 여름철이 가장 바쁘고 즐거웠다. 물론 한 낮의 태양은 뜨겁기 그지 없었지만 일년의 가장 큰 수입을 책임지는 계절이기에 농민들은 보람찬 생활을 했다. 이 때는 어린 가주가 가장 바빠지는 시기였다. 자기의 사람들을 아끼는 어린 가주는 농민들이 열사병으로 쓰러지기라도 할까, 늘 걱정이 많았다. 이 때문에 어린 가주가 들어온 이후로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엔 일을 하지 않고 쉬는 영지 내에는 법령이 지정되었다. 농민들은 전 가주들 보다는 훨씬 일하기가 편해졌다며 입을 모아 말하곤 했었다.

 티어넌 가의 영지의 특징 중 두번 째는, 바로 호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 호수가 아니다. 작은 폭포가 있을 정도의 큰 호수다. 정확하게는 계곡에 가까운 형태일까.  나라를 관통하는 강줄기 중 하나가 티어넌 가의 영지를 가로질렀다. 티어넌 가는 상류에서 중류로 넘어가는 부분에 위치해 있던 탓에 계곡 형태의 호수를 보유하게 되었다. 여름의 한 낮, 해가 가장 뜨거운 날엔 사람들은 강으로 가 열기를 식혔다. 물은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온도를 낮춰주는 효과가 있었으니 말이다. 물고기를 잡고, 배를 타며 뱃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여름은 축복의 계절이고, 강과 호수는 삶의 위안이 되는 장소였다.


 물과 물이 만나는 그 지점, 작은 폭포가 있는 널다란 숲 속에 그들이 말하는 어린 가주가 있었다. 숲에 둘러싸여 다른 곳보다 온도가 낮은 폭포의 앞엔 작은 별장 마냥 오두막집 한 채가 있었다. 앞으로의 후대들이 여름을 나기 편하라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선대가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아이베르크는 그 장소를 꽤나 좋아했다. 엄청나게 시원했으니 말이다. 여름철에는 사용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 잠을 자곤 했었다. 항시 그늘이 져있고 물소리가 들리는 탓에 서늘하단 느낌이 강한 곳이었지만  아이베르크에게 있어서 자신만의 비밀 장소와 같은 곳이었다.  그 날도, 평소와 같이 오두막집에서 일어나 간단히 씻고, 얇은 셔츠로 옷을 갈아입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샐러드 파스타를 부탁해볼까, 아님 냉차를 부탁해볼가. 날도 더운데 사용인들이 만들기 편한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평화로운 날을 시작했다. 


물론, 아이베르크가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의 시작은 조금 양상이 달랐다. 

 

 록시 애너톨은 평소와 같이 티어넌 가의 저택에 방문했었다. 아마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선대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분쟁에 관한 회의를 하러 온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식의 친목다지기를 하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워낙에 몸이 좋지 못한 사람이었으니 쉬려 온 것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그냥 쳐들어왔을 수도 있다. 

 이번 방문의 이유는 가장 마지막으로, 날도 더운데 아이베르크를 놀려먹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저택에 없는 것이다. 저택에만 없었을까, 몇 일을 침구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돌아갔지만, 그 후의 방문에도 아이베르크는 저택에 있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록시는 아이베르크가 어디로 갔는지 수소문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고 있던 티어넌 가의 사용인이 넌지시 아이베르크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아이베르크가 있는 곳을 알게 된 록시는 망설이지 않고 찾아갔다. 처음 오두막집을 보게 된 감상은? 그것은 상상에 맡기겠다. 


  여하튼, 록시 애너톨은 오두막집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던 아이베르크 티어넌을 마주한 것이다.예기치 않은 손님의 방문에 아이베르크의 표정은 황당함 그 자체였지만, 그렇다고 오두막집의 나무문을 안 열어주진 않았다. 오히려 떨떠름한 표정을 가다듬곤 '들어와' 라는 말을 덧붙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베르크 티어넌은, 지금 몹시 당황스럽다.  자신의 편한 모습을 예기치 않게 보여준 것 부터 시작해서 자신만의 비밀 공간을 들킨 기분이었달까. 하지만 왜 이곳에 머물렀는지에 대해 대답하자니 더워서- 라고 하기엔, 뭔가 말하기가 싫었다. 얄상한 자존심이었다. 티어넌 가의 영지의 또 다른 특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호수가 있기에 새벽과 낮의 일교차가 심하게 난다는 것이었다. 호수가 있는 곳은 안개가 많이 끼곤 했고, 안개가 많이 낀 날은 늘 무더웠다. 이 지독한 여름이 시작되고 나서 영지의 아침엔 안개가 끼지 않은 날이 없었다. 무덥고, 무더운 나날이 지속되었다. 


 뭐 마실래? 아니, 안 마실거라도 마셔. 덥잖아. 시덥지도 않는 말을 하며 아이베르크는 차가운 차를 내주었다. 오두막집 안은 정말로 시원했다. 이곳만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숲 속에 위치한 계곡들의 그러하듯 이 곳엔 고요한 물소리와 달그락 거리는 찻주전자의 소리만이 가득하다. 이곳에 있는 이유를  방문객에게 말한다. 저택에 있기 싫어서 이곳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고. 이것은 변명이다. 날을 세워버린 자존심이 결국엔 진실을 말하자는 마음을 툭, 봉해버렸다. 하지만 아이베르크는 록시가 자신이 핑계를 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란걸 알고 있었다. 록시 애너톨은 시시콜콜하게, 다르게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것을 꽤나 잘 알고 있는 편이었으니.

 아이베르크는 차를 마시며 제 앞의 사람을 보았다. 어째 저 창백한 얼굴이 더 창백해 보인다. 더위라도 먹었나? 입 밖으로 내진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지금껏 일했으니 조금은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란 생각에 서류를 옆으로 미뤄놓았다. 절대로, 절대로 록시 애너톨이 방문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록시는 이 곳에 왜 온거지. 묻을려하다가 입을 다문다. 자신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기에 묻기에 양심이 찔렸던 것도 있었고 괜히 이유를 들어서 좋을게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베르크는 흐름이 끊길 듯, 끊기지 않을 듯 한 간격을 두고 말을 이어나갔다. 덥지 않아? 쉬다 가. 쉬다 가도 괜찮아. 여기 엄청나게 시원하거든. 밤에도 제법 잘 만 하고. 


 그 이후로 무얼 했더라?

 폭포의 앞엔 숲이 우거져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다. 공기도 덜 뜨거운 편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계절의 영향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사용인에게 부탁해 시원한 과일을 먹고, 오두막 한 켠에 있던 밀집모자를 씌어주었다. 이거 쓰면 덜 덥데. 밀집모자를 쓴 채 부채질을 하는 록시를 보곤곤 잘게 웃었다. 이 둘의 대화 양상은 한 쪽이 시비를 걸고, 한 쪽이 받아주고. 가끔은 받아주는 쪽이 짜증을 냈다. 그러면 다른 쪽이 웃는 것의 형태를 취했다. 대화의 주제는 고정되지 않고 텀을 두고 바뀌는 편이다. 사교계에 대한 얘기를 하기도 하고, 밤 사이 꾸었던 꿈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아이베르크는 망설이다 최근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 했다. 아주 이상하고 그럴 리가 없던 꿈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꿈이라 부르는 것이겠지만 행복했던 꿈. - 처음 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짤막하고 이해가 되는 편에서, 즐거웠던 것들만. 놀림을 받고 싶지 않기도 했었고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 네가 웃는 표정이 못생긴 고양이 인형을 닮았었다고 꿈 속의 자신이 생각했다고 말했을 땐, 툭- 하고 아프지 않게 주먹으로 치이곤 했다. 네가 날 구했다는 말을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을 듣고서야 웃어보인다.  

 저녁으론 파스타 샐러드를 먹었다. 더운 날, 이양이면 시원한 음식을 먹이는 것이 좋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해가 져 하늘이 주황빛으로 변했다. 기온이 낮아질 법도 한데, 되려 올라가 그늘이 지지 않아있는 평평한 돌에서 노란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지간히 더운 날이야. 밤도 더울 것이다. 예약한 손님 마냥 순서대로 찾아오겠지. 해가 떨어지고, 하늘에 희미하게 별이 보일 때 쯤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붙잡았다. 자고 가던가. 덥잖아. 여기 그래도 시원해. 


 오두막에서 잠을 잔다고 해서 밤의 불청객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택보다는 덜 덥고 이상하게 이곳에서 자면 잠을 더 잘자는 편이었다. 세상과 동떨어졌다는 느낌이 나서 그런걸까? 나는 어디서 자라는 거야. 자신을 찾아온 불청객에 묻는다. 이 물음엔 슬쩍 침대를 가르켰다. 어짜피 자신은 밤을 샐 생각이었으니 소파에서 자면 된다고도 덧붙이기도 했다. 그래도 정 잠 안오면 밖에 나가서 별이나 보고 오던가. 나무가 많아서 그런가,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이상하게 별이 잘 보이거든. 운 좋으면 반딧불이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대답을 바라지 않는 말들을 던진다. 그렇지만 긍정을 바라는 물음들을 던졌다.

 다른 이유는 없다. 단순히 이 곳이 시원해서다. 몸도 좋지 않은데 더운 곳에서 자는 것 보단 선선한 곳에서 자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란 생각이었다. 시간이 늦은 것도 자고 가라는 이유에 끼어 넣을 수 있었겠지. 쓸데없는 배려야.  머리가 말한다.  무엇을 기대하는 거야? 기대하지 않는다.  머리가 마음을 이긴 적이 있던가. 결국 언제나 그러했듯, 오늘도 마음이 이겼다. 어찌하겠는가. 멍청해, 이걸로 충분하지? 이걸로 충분한 것이다. 더우니까. 그게 다다. 사실 자신은 이 불청객이 반가웠던 거겠지.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정작 자신은 이곳에 왜 있냐는 말에 덥다고 말도 못했으면서. 


 하늘에 별이 떠오르고, 달도 제 자리를 찾은 것 마냥 빛을 내기 시작했을 때 이곳엔 없었던 것이라 생각했던 여름이 존재감을 다시금 드러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공간을 채운다. 풀벌래만 애처롭게 우는 이 곳에서 아이베르크는 그제야 미뤄두었던 업무를 보았다. 그래도 오늘의 낮은  나름 즐거웠으니 늦은 시간에 업무를 보는 것 쯤이야, 괜찮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전에 저택에서 네가 자고 간다고 했을 때, 어느 순간 부터 그것이 당연하다 여긴 적이 있었다. 지금은? 


 지금은.



열대야다. 지독한 여름이 찾아왔다. 오지 않았으면 했던 손님이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지독한 너도 찾아오고, 나는 지독하게도 너를 붙잡았다. 결말이 어떨지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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