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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글/인간은 사슴을 사랑했고

HD 21749



 

 

 

 

 

 

첫날의 기록

로베르토 다노바는 XX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XX XXX 연구소에 신입 연구원으로 발탁되어 오늘부터 근무하게 되었다. 이 연구소는 전부터 말이 많았던 연구소로, 어둡고 축축한 숲속 한가운데 있고, 외부인의 출입에 있어서 검열이 심한 곳이었다. 연구소의 크기는 꽤 컸으며, 연구소 주변엔 철제 철조망이 둘려 있었고, 철조망을 기준으로 500m는 지뢰밭이었다.
이곳은 허락되지 않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왜 이곳은 비밀이 많습니까."
그것이 로베르토 다노바가 첫날 연구소에 와서 처음 던진 질문이었고. 그 질문에 대해서 선배 격인 직장 동료들은 대답 대신 연구소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직접 봐봐. 그리고 네가 두 눈으로 확인해. 아, 심연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렴. 함부로 심연을 들여다보지 말고.

그날 이후 로베르토 다노바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뒤집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둘째 날의 기록

이곳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모이는 곳이고, 그것들을 연구하며 연구원들의 모독적인 상상과 윤리적이지 못한 실험, 자신들의 욕망이 실험으로써 표출되는 곳이다.
로베르토는 왜 교수가 자신을 이곳에 추천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다.
살아 움직이는 액체, 온종일 빛을 내는 수정,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 그런 것들. 혹은 차마 묘사도, 설명도 할 수 없는 것들.

우리는 이것들을 가지고 실험해. 에너지를 뽑아내거나, 움직임을 관찰하거나, 아님.. 오, 아니야 로베르토. 가끔 악질적인 얘들이 몇 있는데, 걔네는 실험체들을 괴롭히는 걸 즐기거든. 그러니 되도록 그런 애들이랑은 어울리지 말고. 
자신을 데리고 연구소 이곳저곳을 설명해주는 선임연구원 A는 로베르토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는 금발에 서늘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로베르토 다노바는 실험체들을 무심한 눈으로 보며 선임연구원의 말에 집중했다. 
자, 그리고 이게 우리 연구소의 최대 관심사이자 중요한 것이지. 소개할게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것은, 지금껏 보지 못한 어둠이었다.

셋째 날의 기록

이것의 이름은 HD 21749라고 했다. 그것을 들은 로베르토가 그것은 행성의 이름이 아닌가요? 지구와 비슷하다고 했던 행성. 그러자 선임연구원 A는 그것이 맞다고 해줬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지 로베르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저 어둠뿐이잖아. 어디가 지구, 아니..여기서는 인간일까?
어딜 보아서 인간과 닮았다는 것인가
영어로 일일이 부르기 힘들어, 통칭 '

'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은 실험관 안에 갇혀, 산소호흡기와 등과 팔에 관이 잔뜩 꽂힌 상태로, 머리에  두개골을 썼다가, 어두운 안개로 모습을 바꾸기도 하면서, 혹은 괴물 그 자체로 몸짓을 바꾸기도 하며 시험관을 부실 듯 폭발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시험관엔 흠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인지 다시 모습을 바꾸더라. 

그 모습은 인간이었다. 검은 머리에, 눈을 감고 있는 인간. 아, 이래서 그 행성의 이름을 붙였구나. 


로베르토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어머, 
이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건 오랜만이네. 네가 와서 그런가? 운이 좋네 로베르토.
선임 연구원은 꽤 쾌활하게 말했다.


다섯째 날의 기록.

로베르토 다노바는 이 
의 정보와 행동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유인즉슨, 처음 을 보러왔을 때 이 인간으로 변했다는 얼토당치도 않은 이유였다. 전의 보고서를 보면 이 모습을 바꾸는 기준은 순전히 제 멋대로인 듯했으므로, 즉 로베르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 미동도 없다. 은 오늘도 인간의 모습이었다.

로베르토 다노바는 선임 연구원 A가 말한 실험체들을 괴롭히는 연구원들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그들은 
에겐 그 괴롭힘의 강도가 심한 듯하였는데, 그 이유가 자신들과 같은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선임 연구원A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에게 약물을 주입하고, 전기를 흘려보내는 등 괴물보다 더 못한 짓 들을 하며,이 시험관에서 요동치는 것을 보고 즐겼다.

 

로베르토 다노바는 그들을 말리지도 않았지만, 함께 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만히 나와 연구실의 실험 장비의 전원을 내려버리는 것으로 행동을 대신했고, 그들이 씩씩거리며 연구실에서 나온 후에야 다시 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은 지쳐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로베르토 다노바는 
을 시험관 밖에서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돌린다.


열흘째의 기록.

로베르토는 뭘 좋아해? 다음에 그거 먹으러 갈래? 연구소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휴일에 밖으로 나가자.
선임 연구원 A는 가끔 저런 말을 걸어왔다.

자신에게도 나쁜 것이 아니어서 로베르토는 파스타를 좋아한다고 답했고, 휴일에 먹으러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열한 번째의 기록. (어째 이때부터 날을 세는 기준이 바뀌었다.)

그날도 로베르토는 
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 어둠으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반복했다. 눈을 감고, 산소호흡기에서 나오는 공기 방울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혼자 야간 근무라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HD  21749'  - 오늘도 미동 없음. 한 시간가량 안개의 형태로 변해 물에 흩어져 있듯이 변했다가, 다시금 인간의 형태를 유지함. 최근 들어 인간의 형상을 자주 유지, 이에 대해선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임.
'HD 21749'는 눈을 뜨지...........

로베르토 다노바는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이, 눈을 떠 실험관 밖에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슬 퍼런 금안. 몸은 움직임이 없는데, 눈동자만이 쉴 새 없이 움직이다 인간을 향해 멈추었다.

인간은 그것을 멍하니 보았다. 홀린 듯이 어둠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시험관에 대었다.

...

 


실험체 'HD 21749'의 인간 형태일 때의 눈 색은, 금색.


열두 번째의 기록.

그날은 
의 실험실에 선임 연구원 A가 놀러 온 날이었다. 선임연구원 A는 이 인간의 형태를 이리 유지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본다며, 꽤 놀라워했다. 로베르토는 그런가요? 하고 말하며 다시금 시선을 에게로 옮겼다. 

 

은 오늘은 눈을 뜨지 않을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로베르토, 오늘 주말 약속 안 잊었지? 차 있어? 없다고? 알겠어, 그럼 내가 데리러 갈게.


로베르토는 
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알겠다고 대답했다.

기분 탓이었을까. 

 

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열다섯 번째의 기록.

어제, 
의 데이터가 과도하게 집계가 되면서 에게 부착되어 있던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내일은 휴일이었지만 연구원 모두가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로베르토 다노바는 꼼짝없이 과 휴일을 함께 해야 했다.

 열여섯 번째의 기록.


아.


들릴 리가 없지만 로베르토는 시험관에 기대 보고서를 작성하던 중 그렇게 말했다.

너, 얼마 전에는 그렇게 날뛰더니만 또 왜 조용해. 사람 힘들게 한다 정말.

로베르토 다노바는 한참을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그곳에서 잠이 들었다.






서른 날 번 째의 기록.

은 여지없이 조용하다. 설상가상으로 일정하게 내놓고 있던 정보의 양도 줄어든다.


로베르토 다노바는 보고서에 기록한다. '오늘도 미동 없음. 인간의 형상을 열흘 이상 유지 중임.'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이 눈을 떠 자신을 보고 있었다. 확실하다. 나를 보고 있다. 


아. 


로베르토는 손을 뻗어 시험관을 만졌다. 
을 만지는 것 대신. 은 그것을 알아 차린 건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마흔 세 번째 날의 기록.


선임연구원 A는 연구실에 자주 놀러 온다.

로베르토가 있으면 
이 얌전해지다 보니, 이주일 전 부터 이 연구실엔 로베르토만 배정된 탓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을 제압하는데 꽤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는 듯하다. 덕분에 로베르토 다노바는 혼자가 됐다. 전에 실험체들을 괴롭히는 무리를 방해했다는 것이 들키면서,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로베르토를 피하는 기류가 생긴 탓도 있었을 것이다. 

로베르토, 내일 바쁘니? 내일 안 바쁘면 나랑 영화 보러 가줄래.

하지만 선임 연구원 A는 가끔, 요즘은 자주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로베르토 다노바는 한참 생각하다가, 연구소로 온 이후로 처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쉰 번째의 기록.

의 정보량이 점점 줄어든다. 

 

이 죽어가는 것 같다.


로베르토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을 마주 보았다.


예순다섯 번째의 기록

이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산출되는 정보가 0에 수렴했다.

 

연구소는 을 이틀 후 폐기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은 이틀 후 떠난다.


어디로?


예순 여섯 번째의 기록.


내일이다. 로베르토는 연구실을 정리하고, 지금까지 기록했던 
에 대한 보고서를 폐기하고 지운다. 갈려가는 종이를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속이 안 좋다.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 오늘도 눈을 떠 자신을 보고 있다.

로베르토는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시험관에 다가갔다. 지금까지 함께해준 실험체에게, 그에게, 

 

에게, 'HD 21749' 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낸다.

 

이마를 시험관에 대고, 손을 뻗어 대었다.



아, 이제 편해질 거야.




내일이면 더 이상 산소 호흡기를 달고 물 속에 있을 이유도 없을 것이고, 정보를 뽑아간다며 꼽은 관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엔.......

너는 어디로 갈까. 

 

 

아.


예순 일곱 번째 기록.


무언가 잘못 되었다.



 노트 중간이 심하게 찢어져 있다. 





...첫 번째 기록. 무언가 이상하다. 검고, 붉은 색으로 휘갈기듯 써있다. 로베르토 다노바의 필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이 인간과 함께 할 거야.네게 각인된 내가, 너를 내게 각인시킬거야.모두가 너를 잊어도 나만은 너를 기억하게 만들어줄거야.인간아, 나의 작은 인간아.



인간은 반 정도 붉게 변한 실험 가운에 둘둘 말려, 기절한 채 
에게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과 인간을 기억하는 인간은 없었다.